
사진 한 장이 기억을 되살리듯, 카메라 이전의 세계는 그림으로 시간을 붙잡았다. 《시간을 읽는 그림》은 이 사실을 출발점 삼아, 수천 년 세계사가 어떻게 ‘그림의 형태’로 우리 앞에 남았는지 추적하는 책이다. 흑사병 시대의 광신적 회개 의식부터 식민지 패권을 둘러싼 바다 전쟁, 근대 의학을 열어젖힌 공개 해부극장까지. 우리가 교과서에서 몇 줄의 문장으로 배운 사건들이 한 점의 이미지로 되살아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거장들의 회화를 중심으로 미술사를 풀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려한 명화보다 신문 삽화, 판화, 거리 포스터, 풍자만화 같은 ‘기록의 그림’에 더 눈길을 준다. 그림을 예술적 완성도의 문제에서 떼어내, 그 시대 사람들의 감정·질서·두려움·기술 수준이 어떻게 시각 언어로 번역되었는지를 탐구한다. 다시 말해,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남긴 세계’를 읽는 책이다.

그렇다고 무겁고 난해하게 흐르지 않는다. 기록화 속 장면들은 때로 기묘하고, 충격적일 만큼 생생하다. 아즈텍의 인신공희, 파리 포위전 시민들의 쥐고기 식사,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공인한 해적들의 약탈, 17세기 암스테르담 해부극장에 몰린 수백 명의 호기심까지. 모두가 “정말 저런 일이 있었다고?” 싶은 순간들이다. 이 이미지는 역사 교과서가 미처 보여주지 못한 ‘감정의 온도’를 드러낸다.
책의 큰 장점은 균형 잡힌 시각이다. 유럽 중심의 세계사가 아니라, 메소아메리카·아프리카·중국·몽골 등 다양한 문화권의 기록화를 병렬적으로 살피며, 문명 간 시차와 시선 차이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미술사 책이 아니라, ‘이미지로 읽는 세계 인문학’에 가깝다.

그림을 보고 있으려면 문장보다 빨리 다가오는 어떤 감정이 있다. 작가 김선지는 바로 그 지점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그림이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역사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늘 누군가의 눈앞에서 벌어졌던 구체적인 장면이었다는 것. 그래서 《시간을 읽는 그림》은 세계사의 틈에 숨어 있던 질감과 냄새, 색깔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무겁지 않은 언어로, 하지만 가볍지 않은 내용으로, 과거로의 통로를 자연스럽게 열어준다. 지금, 복잡한 세계를 다시 배우는 데에도 꽤 좋은 도구가 될 책이다.
📖 책 정보

- 제목: 『시간을 읽는 그림』
- 저자: 김선지
- 출판: 블랙피쉬
- 장르: 미술교양 / 예술사
- 사양: 392쪽
- 가격: 2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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