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이름을 문지르며》

이미지_양승규
  • Date: 2024. 11. 13 – 2024. 12. 15
  • Place: 일우스페이스
  • Location: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17 대한항공 빌딩 1층
  • Hours: 화 – 금, 10:00 – 18:30 / 토, 13:00 – 18:30 / 일, 13:30 – 18:30
  • Contact: 02-753-6502

노충현, 방, 2024, oil on canvas, 97 x 145.5cm
이미지_양승규

버럭 소리칠 때 귓가에 쇠를 자르는 소리가 들렸다. 매우 정교한 솜씨인 듯하다. 그 균일성에 나를 던졌다. 비로소 이루어진 자아의 기투에 쨍한 울음은 팽창했다. 이로써 세계는 천장이 내려앉듯 닫혔다. 그제야 쇠 자르기가 멎었다. 지금까지 경험한 깊이보다 두 배쯤 깊은 침묵. 주변은 소리를 잃은 듯, 아니면 그것을 은닉하듯 허망하면서도 마음 졸이는 생에 들었다. 방 안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건 그때였다. 

누운 자리 숲과 같고, 사방으로 나아갈 방향은 무한하다. 새벽에 깬 등은 문을 닫고 사라졌다. 최초의 고립은 그렇게 닫힌 문과 함께 시작되었고 여태껏 존속하고 있다. 이런 형국에 바닥을 치며 자신에게 일깨운 바는 무언가 천천히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멀어지고 있다면 문 사이가 벌어져 그 뒷모습을 – 벌써부터 점이 된 형태를 – 바라볼 수 있을 터다. 행과 불행이라는, 시답지 않은 둘과 보낸 수 분이 틈 없는 방과 여생을 함께한다. 

“서너 잔의 물이 그립군.” 그 지겹던 강을 견디고 뭍에 발을 대며 내지른 말이었다. 

방과 강 사이엔 서로 독차지한, 느린 고독이 있는지도.

노충현, 방, 2024, oil on canvas, 91 x 116cm
이미지_양승규

노른자 훈김에 익어간다. 삶과 사물의 경계는 다수를 병행한다. 까무룩 잠이 든 뒤로 며칠이 지났다. 요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요량으로 이부자리를 개었다. 창이 없는 방 안에서 환기하는(혹은, 그런 기분이라도 느끼는) 방법은 정리 정돈뿐이다. 한차례 환기가 이루어졌다. 그럴 때면 일부러 고집 있는 표정을 지었다. 일자로 다문 입에 비해 자유분방한 눈은 자유의 증명을 차일피일 미루며 게으름을 피워 댔다. 무료하지만 무례하지는 않은 이곳이 썩 마음에 든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은근히 곳곳을 사유하였다.

형태를 보이는 것의 유지를 바랐다. 무형의 대상들은 나의 추상을 넓혔다. 어찌 보면 나는 잔 속에서 녹아가는 얼음인지도 모른다. 점점 각진 모서리를 잃어가면서 흐르듯 걸을 터다. 그러다 퍼뜩 예정에 없던 공상에서 깨 현실을 등지지 못한 초점으로 둘러본 내부는 세부적으로 곱지만, 전체의 상은 조악했다. 조금만 타오르자, 다짐했던 날, 장마는 제 앞에 있는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텅 빈 식탁 위로 쏟아지는 잿빛. 몹시 달뜬 모양새다.

노충현, 빈 방, 2024, oil on canvas, 41 x 31cm
이미지_양승규

터무니없는 하루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앞선 분리에 대해 군소리하지 않고 군음식이라도 먹으려 했으며 나머지는 끝내 예의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딘가 서글픈 일이었다. 무리하게 걸음을 옳기다, 자질구레한 감상에 빠진 이를 나는 알고 있다. 반짝이던 불빛, 그림자를 양산한 자신의 과거를 오로지 섬광에 두었다. 운이 좋다면 정각을 알리는 소리를 하루에 몇 번이나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해롭다고 기피한 적이 있지만, 사실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은 뜻이 적당한 대상으로 예의 소리를 삼았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좋은 솜씨로 귀를 틀어막는 것 말곤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젠 무해한, 오히려 이로운 소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오래된 옷이 걸린 행거, 헌 옷을 수집하는 낙으로 사는 듯하다. 어제보다 못한 날을 난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럴 때마다 또래보다 늙수그레한 내가 무엇보다 행거에 어울린다고, 밖으로 내지 못한 소리로 허공에 반듯하게 악을 썼다. 기표를 정성스레 표구해 두었다. 그곳에서 물이 나온다면, 나는 그것을 수도꼭지라 부르리라.

노충현, 빈 방, 2024, oil on canvas, 11 2 x 145.5cm
이미지_양승규

증명의 도구로 우뚝 선 방. 세차지 못해 결국 하얗게 불어난 밤. 나의 어제는 이미 끝난 것 같은데, 아직도 지속되는 중이었다. 그 지속을 위한 공간과 시간은 개념적으로 무르익었다. 이 피치 못할 사실에 둥근 어중간함을 보낸다. 제 발에 떨어진 꽃이 꼭 이와 같다. 밖에 나서기 전 어느 시대와 어떤 형태의 빚짐을 확인하였다. 유쾌한 기분을 붙박이장에 유배 보내듯 넣어두고 감고 뜨는 눈. 수중에 낡은 지폐가 펄럭인다. 내겐 아직 펴지 못한 낱장이 몇 있지만, 그것들 구겨진 채 그렇게 존재함을 이틀에 서너 번꼴로 확인한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첫 번째 조소(嘲笑). 

방 안에 우물이 있다면, 하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그곳에서 물을 길어다 상태가 좋다고 할 수 없는 통에 담아두고 저녁나절 침묵을 깰 때 사용하는 거다. 별다른 수단이 없던 참이었는데 아주 잘 되었다. 이런 있으나 마나 한 답도 귀인으로 받들 물음이 어딘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낮 동안 달궈진 보도 위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항간, 때아닌 박수, 발 없는 말 모두가 기록적인 피상으로 드러났다.   

seunggue Yang
seunggue Yang

새로운 아침을 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