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터 Teo》

이용재 개인전 <터 Teo>
이미지_양승규
  • Date: 2025. 01. 03 – 01. 25
  • Place: 바이오갤러리
  • Location: 서울 중구 소파로 129 구관4층 401호
  • Hours: 수 – 일 14:00 – 19:00
  • Contact: @biogalleryseoul

포(包), 2024, Oil on linen_oblique frame, 25 x 25.5cm_10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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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풍경을 도배하는 일에 석공이 끼어들었다. 돌을 다루는 사람치고 서글서글한 인상이라, 그에게 유약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근래 품에 가까이 두었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그것은 힘없는 나뭇가지 축 늘어지듯 고개를 떨군 채 땅바닥을 잊었다.
한편으로 실제로 석공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사실 돌을 다루는 사람들은 모두 서글서글한지도 모른다. 넉살 좋게 다가와 냉큼 부린 너스레를 보며 함께 웃고, 그렇게 넝마가 된 날을 견디기도 하면서 딱딱한 선반 위에 삶의 섭리를 펼쳐 놓는 것. 돌 깨는 소리가 순식간에 무르익었다.

방열기는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예의 도배 일이 점점 끝을 향해가는 것과 궤를 같이한 생명 활동. 호흡이 지속될수록 내부는 훈훈해지고, 일종의 안도감마저 들었다. 투박하지만 견고한 일상은 어느 위치에 있으며, 그것의 위상이 변할 때 나에게 달려들듯 치우칠 작업이 있을지. 거듭 곤란이다.

책(冊), 2024, Oil on canvas, 30.5 x 20.5_30x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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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렴을 걷을 때가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내가 정확한 시간을 기피한다는 것을 알고, 그러니까 일종의 배려의 차원에서 말하는지, 아니면 단지 그의 습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내겐 좋은 일이었다.
공중에 정박해 있다가 손에 둘둘 말린 베 조각의 형편은 중립적인 입장을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극단적인 감정의 호소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철저한 논리의 장마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진다. 물 한 번 엎질렀다고 못 쓰게 된 식탁보쯤 아쉽지도 않다. 종일 분주하게 돌아다님으로써 게걸스럽게 시간을 잡아먹고 잠까지 줄여가며 마음껏 흘린 군침으로 비현실의 얼룩에 상접해도 언제나 꿈은 낮다. 지금까지 지켜온 가치 중에서 한 글자는 없다. 오직 이를 위한 삶이란 무너질 만하고, 버티며 서도 늦다.
외로우리만치 복잡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와 튼 대화는 지향투성이 봇짐이었다. 분명 보화라지만, 썩 내키진 않는 보퉁이.

이폭병(二幅屛), 2024, Oil on linen, 177 x 115cm_2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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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매는 표정을 잃어도 단마디 위안도 없다고 말했다. 내 말과 별개로 그는 허공에 사선을 그었다.
외투와 고백은 묘하며 서로 닮기도, 고스란히 서로를 안기도 하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존재 둘이 포개졌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역사(驛舍)엔 허허벌판이 그득하고, 물로 빚은 군중 어렵사리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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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懸板), 2024, Oil on linen_oblique frame, 60x 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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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약볕은 길구나. 널조각 한 움큼 쥐고 풀어내는 숙원은 사철을 담은 광에 놓였다. 터럭에 붙인 뜻이 설렁설렁 이는 바람에 수고를 덜며, 떨어지지 못한 지난날을 돌이키는데 환기 없이 꽁꽁 싸맨 실내가 이에 응한다. 동의로 쓰기엔 사뭇 각진 의견이 있었다.
언덕배기 초가는 다 쓰러져 가다가 멎었다. 멈추기까지 소요된 시간 하며, 투여된 볕 자리와 사건의 끌이 순전하게 생각나는 것은 지당한 일인가. 지레 삼킨 겉에 속은 내란으로 가득 찬 밤을 보냈다. 붕괴는 두 가지 형태로 의식에 부딪히는지도 모르지.
억세면서 무른 면이 있는 지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먼 나라 이야깃거리라도 된 듯한 얘기를 듣고 서둘러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게 몸에 두른 변화로 특정 변모에 휩싸이는 기분을 한층 더 익힌다. 누군가는 눅눅한 시기에도 손바닥을 말렸다.
설령 툇마루 뒤 고목이 반으로 갈라져도 물론 성한 밑동이야. 그 땅 밑의 세계가 일정한 수량으로 유지되는 건 비단 해묵은 현상일까.

칠판(漆板), 2024, Oil on canvas_walnut frame, 46.7 x 33.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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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경중을 논한다. 어떤 물건의 소유를 정하듯. 유사한 성질대로 모인 구역에 획을 더하여 도모한 안정은 심정의 것이다. 새로운 지역에 발 들인 이가 그곳에 오래 머묾으로써(정착은 아닌 생활) 자신에게 익숙함을 배양하고, 인근에 더 이상 낯섦이라곤 없을 때 또 다른 곳에 발 들이려 이동한다. 그에겐 그동안 머물렀던 임시 거처가 늘어나는 것이 주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수를 하나하나 헤아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무량한 감격에 겨워 겸연쩍었던 날도 잊고, 새된 목소리로 묽은 새벽 내놓으란다.
겸상을 요구하는 감상 이겨 먹으려다 고꾸라진 탓이다. 이젠 홀로 언 밤을 보내는 게 그저 대수롭고, 눈가에 억울함마저 감돈다. 서로 마주한 채 찬을 들었다면 처지가 지금보다 나아졌을지, 속절없고도 야윈 생각을 이루었다.

재주껏 슬퍼하며, 비옥한 체면에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정경을 그것에 매몰되듯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외자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
‘들끓는다고 해도 외곬이라지. 그토록 지친 몰골 하며.’

모자(冠), 2024, Walnut frame_oil on linen(표구_송영욱), 62 x 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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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같은 말로부터 시작된 것일 터다. 눈앞의 대상을 본다고는 하지만, 단지 말로 그친 적당함이었고, 정함 없는 기다림을 허구한 날 수행하는 자도 되었다가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눈에 익힌 변두리는 현실감이 결여된 대상처럼 느껴진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로는 부족한 기분이 들어 결함에 관한 기록을 부리나케 뒤적거렸다. 이 모습이 타자에게 허공을 찢으려 손을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였을까.

부연 섬을 지칭하는 이름을 짓고, 이를 부르기보단 삼키며 휑한 거울에 비칠 수도 있는 설명을 끊임없이 부연한다. 혹시나 하고 내지른 외침에 발등이 차인다면, 그 아픔은 결코 복종을 모를 일이다.
변증으로서 숙고는 유용한 방법이 되기에 나는 이를 종종 사용하며 때론 얄궂은 심보로 시험해 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결과는 제법 많은 가짓수로 존재하며, 그렇게 단독은 깨지고, 여분의 숨통은 트인다. 좁은 터에 과연 잠정이 움트는가.

선물(膳物)/Object so much foreign, 2022/24. Oil and tar on wood, 21x21x4.5cm. by YI Yonns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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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gue Yang
seunggue Yang

새로운 아침을 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