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 긴자의 번화한 거리 위로 빛나는 건축물이 떠오른다.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에르메스의 일본 본사이자 플래그십 스토어, 렌조 피아노 빌딩 워크숍(Renzo Piano Building Workshop)이 설계한 ‘메종 에르메스(Maison Hermès)’다. 2001년 완공된 이 건축물은 브랜드의 철학을 공간으로 풀어낸 사례로, 긴자의 도시 조직 속에서 조형적이면서도 열린 구조를 유지하며 빛과 공간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긴자 속 투명한 성, 13,000개의 유리 블록
메종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리 블록으로 이루어진 파사드다. 13,000여 개의 유리 블록이 건물을 감싸며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부드럽게 연결한다. 이 유리는 빛을 투과하면서도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 반투명한 질감을 지녀 낮에는 자연광을 실내로 확산시키고, 밤에는 건물 자체가 은은하게 빛나는 랜턴이 되도록 만든다.
일본 전통 등롱에서 영감을 받은 이 디자인은 긴자의 야경 속에서 도시와 건축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유리 블록은 미적 요소를 넘어 지진 환경을 고려한 구조적 해결책이기도 하다. 강철 프레임에 연결된 유리는 실리콘 접합부를 통해 최대 4mm까지 유동성을 확보해 지진 발생 시 충격을 흡수하는 커튼 같은 역할을 한다.


한정된 대지에서 수직으로 확장된 공간
건물이 자리한 대지는 폭 11m, 깊이 56m로 상당히 협소하다. 하지만 렌조 피아노는 이 공간적 제약을 수직적 디자인으로 풀어냈다. 15층에 이르는 건물 내부는 기능별로 층이 나뉘어 있으며, 자연광과 투명성을 활용해 확장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하층부 4개 층은 에르메스 플래그십 스토어로 구성되어 브랜드의 정체성을 경험할 수 있는 쇼핑 공간을 제공한다. 그 위로는 장인들의 공방과 기업 사무실이 자리하며, 7층에는 전시 공간이 마련되어 에르메스의 창조적 유산을 소개한다. 최상층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조성된 옥상 공간이 있어 긴자의 밀집된 도심 속에서도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한다.
이 건물은 브랜드의 매장이자, 장인정신과 창의성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빛과 물질의 경계를 흐리는 건축
렌조 피아노는 빛과 물질을 결합해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을 새롭게 정의하는 건축가다. 그의 대표작인 파리의 퐁피두 센터, 로스앤젤레스의 아카데미 박물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건축을 구조적 요소의 표현이자 감각적인 경험의 장으로 만들어낸다.
메종 에르메스에서도 이러한 철학이 반영됐다. 유리 블록은 단순한 외장재를 넘어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모서리를 감싸는 곡선 형태의 유리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부드럽게 흐리며, 빛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유도한다. 낮에는 긴자의 도시 풍경을 반사하며 변화하는 표면을 만들고, 밤에는 내부 조명과 어우러져 도시에 부드러운 빛을 더한다.
건축의 기본 요소인 빛, 공간, 물질이 조화를 이루며, 이는 건물 자체가 살아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2001년 완공된 메종 에르메스는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긴자의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브랜드의 철학을 건축적 언어로 풀어낸 이 공간은 단순한 매장을 넘어 에르메스가 지향하는 가치와 감각을 담아낸 공간으로 기능한다.
렌조 피아노는 긴자의 복잡한 도시 환경 속에서 하나의 빛나는 조각을 만들어냈다. 빛과 물질,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이 건축물은 긴자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동시에, 브랜드의 정체성을 빛과 공간으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