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창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엄은솔(b.1994)은 사람을 필요로 했던 사람이다. 칼스루에 주립 미술 대학교에서 디플롬과 마이스터 과정을 수료하며 7년간 독일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죽음과 두려움에 관한 그림을 그렸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라 믿었지만, 그림 속 인물들은 정면을 바라보게 되었어도 정작 자신은 아니었기에 그 장을 어렵게 마무리했다.
3년 전, 서울역 근처로 돌아와 작업을 시작했다. 예전의 그림들이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주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세상을 향한 사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프지만 너무 아프지 않은 위로를 주고 싶었다.

엄은솔은 이제 시간의 선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영화가 2시간의 시간을 선물하듯, 그의 그림도 어떤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선택했다. 꿈에서 영감을 얻거나 꿈 같은 이야기를 창조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그림을 그린다. 그림 속의 익숙한 공간은 외부가 되고, 처음 마주한 자연은 내면으로 변한다. 결국, 문을 열고 들어온 자신이 밖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엄은솔의 작품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의 관계를 다룬다. 어느 한쪽이 우월해지지 않는 동등한 관계를 추구하며, 그림 속 자신과 그림 밖 자신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관객을 자신의 세계로 초대해 그들만의 시간을 선물하려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시공간은 재해석된다. 최근 작업에서는 배경이 실내에서 실외로 확장되며 자연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엄은솔은 특유의 널찍하고 비정형적인 캔버스 틀을 직접 만드는데, 낯선 형태의 캔버스와 자연의 조합이 그림 속 인물들과 묘하게 어울린다.
작품 구상은 영화의 시놉시스처럼 구체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엄은솔 자신도 알 수 없거나 알 필요가 없다. 관객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작품을 감상하면 된다.



엄은솔에게 그림은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야기다. 그녀의 작품은 꿈에서 도망치지만 결코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역설적인 바람이 담겨 있다. 삶과 죽음, 자아와 타인 등 경계의 무화(無化)는 다른 영역으로 번진다. 캔버스의 규격을 넘어서며, 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인물들은 점점 밖으로 확장해 간다.
작가의 작업은 우리가 간과했던 인생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렇게 엄은솔의 그림은 우리의 꿈과 현실을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