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TwinFlame》 조은시 개인전

<TwinFlame> 조은시 개인전_YKpresents
이미지_양승규
  • Date: 2025. 03.08 – 04. 05
  • Place: YK Presents
  • Location: 서울 중구 을지로43길 13 대화빌딩 지하 1층
  • Hours: 화 – 토, 13:00 – 18:00
  • Contact: @reallygoodpoem

조은시, 방법론적 접근, 65 x 65cm, 캔버스에 유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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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한 사내의 얼굴 위로 몇 겹의 피륙이 떨어졌다. 거칠기로 유명한 지역에서 지은 천 쪼가리는 어느 무덤을 형상화하기도 하고, 도를 넘는 형태를 해체하기도 하였다. 그의 내부는 소금기 있는 물을 담았고, 그것의 수위는 한 달을 반으로 갈라 턱 끝까지 미친 절반과 발목 언저리에 그친 나머지로 제 삶을 구성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발길이 끊긴 골목 노릇 하느라 시 쓰기에 공백이 생긴 그는 시답지 않은 현상의 주검과 시의적절한 배반을 보았다. 웃음기 어린 사건의 내막은 대체 무엇일까.
썩 매끄럽지 않은 과정을 잃고, 무언에 씐 양 현실 그 너머를 배웅하며 부랴부랴 꾸린 배낭은 어느 산의 모양이었다. 어깨에 짊어진 산세의 위용이 눈 덮인 산의 위험으로 변모한다. 혹은 그것으로 돌아간다. 그가 고도를 높일수록 가빠진 숨은 먹구름의 돌연변이라도 된 듯 희었다. 건너편 산자락을 온몸으로 닦으며 비스듬히 아래로 떨어지는 잔상에 허구를 섞어 빚은 인물은 문득 그이기도 하다.

기호의 서정성에 대해 몇 날 며칠을 태운 적이 있다. 그 사이 손등에 박힌 가시는 무관심에 환멸을 느끼며 대안적 인물을 찾아 낮은 활공을 하였다. 각진 날갯죽지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하다. 어떤 말을 들을 때면 순식간에 그 말의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는 버릇은 분석적인 삶에 얼마만큼 기여하는 것일까. 오두막과 부뚜막 중 후자를 선택한 이유는 그저 기표가 경음이었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걸어 둔 옷가지 위에 박힌 매듭은 손쉽게 풀어질 억양이기도 하다. 상당한 징후가 몰려오는 오늘, 이런저런 일이 이론화될 터다.

조은시, 평행세계, 20 x 26cm, 판넬에 유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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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시, 10분의 9, 145 x 97.5cm, 캔버에 유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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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감각이 판을 치는 공간 속에 어설픈 더위를 생각하는 건 도리어 해가 되었다. 여념의 손상은 순서상 아직이라고 되뇌며 오래된 사물의 대표적인 특징을 떠올렸다. 새벽의 외침은 아침을 가로지르는 데 애 먹었는지 이제야 제 끄트머리를 보였다. 쨍한 시절에 돋보이려 행한 아첨이란 침침한 서두일 뿐이다.
한 잔의 물에 담긴 언어가 하염없이 존재를 행할 때 어수선한 것들 동시에 도약한다. 시린 눈으로 끝까지 헤아리던 횟수는 두 자리에 만족한 듯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고, 나는 무심코 능란한 여름을 뱉었다. 발화의 시점을 왜곡하는 말에 정신은 그리 급하지 않은 방안을 착상했다.
한낮에 잠이 들었다. 졸음의 기미가 뚜렷한 형태를 취하는 걸 알고도 이를 저지하지 않아 예견된 일이었다. 권태가 일기도 전 잠시 벗어났던 일상에 복귀한 건 지독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온 한낮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대체로 무익한 대화는 상상이 결여된 이와 돈 걱정뿐인 사람의 처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각기 성질이 다른 빈곤을 떠맡은 채 들쭉날쭉한 이상을 믿었다. 심심치 않게 식사를 거르고, 그 대신 저마다의 기호를 섭취했다. 가령 턱을 괴거나 5분간 쉬지 않고 달리는 것 등. 섭식의 다양성은 없었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취향의 매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짓수 없는 고립은 당연하다시피 적수가 없었고, 어떤 위기도 없이 천천히 늙어갔다.

조은시, 하드보일드, 25 x 70cm, 판넬에 유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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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시, 땅속 연대기, 30 x 30 x 45cm, 판넬에 유채, 화산석,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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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건물은 전반적으로 오래되었지만, 정문만은 새것이었다. 갓 태어난 동물이나 방금 만든 음식 같다고 먼지 하나 없는 문고리를 잡으며 그는 생각했다. 건물의 내부는 별다른 특징이라고 할 건 없었다. 예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것은 이곳만의 속성이 아니었기에 잠깐이나마 기대한 비일상을 접었다. 다분히 일상적인 체념이었다. 서너 걸음을 늘려 승강기에 올랐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누가 있었다고 해도 그의 존재 양식이 변할 일은 없다. 그 점에서 그는 일관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묘사는 어째 입에 붙지 않은 발음을 연습하는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추상적인 번호판은 무구한 이의 변호를 원하는 듯한 외형으로 존재했으며 홀수 층 버튼은 짝수 층 버튼에 비해 금이 가거나, 얼룩져 하나같이 훼손된 상태였다. 그는 6층 버튼을 벽면에 새기는 투로 눌렀다. 때맞춰 감은 눈이 미래를 일부 예견하고 어제를 두 번 산 느낌을 주었다.

승강기에서 나와 마주한 정경은 몹시 꿈틀거렸고 도중에 자신이 흔한 정물이라도 된 듯 굴었다. 간헐적인 굳음은 신경 쇠약에 걸린 사내의 울음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터다. 빈자리가 거대한 대양에 부유하는 섬 무리처럼 놓여 있었다. 그는 그중 가장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곳을 골라 자리 잡은 후 기나긴 표류를 시작했다. 제 삼의 눈으로 본 의식의 관망은 바람 꺾은 날의 깃대와 처지를 교환하고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산란한 정신과 더불어 흐릿한 눈앞이 그에게 이곳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릴 때 그는 하나에서 둘이 되었다.

조은시, 땅속 연대기, 30 x 30 x 45cm, 판넬에 유채, 화산석,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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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시, 크고 작은 것, 193.9 x 260.6cm, 캔버스에 유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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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넘기는 데 양손은 필요하지 않다. 돌이켜보면 그저 아연한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이에 주석을 단다면 무엇이 좋을지, 꽉 막힌 의중에 아직 빈틈은 없다. 꼭두새벽부터 날개 펴고 공중을 만끽하는 것. 윤곽이 불분명한 새보단 뚜렷한 나비를 의식으로 불러오며 짓는 숨. 앞선 두 행위에 동시다발적으로 파도가 인다. 돛으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천 위로 내륙을 가득 부어 흙이나 들풀 냄새로 그것의 처지 일반을 덮을 것이다. 그 정도의 알맞음이라면 걱정으로 돌입한 어느 작정도 멎으리라.
얕은 잠은 문 너머에 있는 우물의 깊이를 짐작 못 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밤을 대여섯 번 접을 때 생기는 선의 수만큼 각성을 맞고, 점점 횟수가 늘어갈 때마다 불길한 예감은 커져 갸륵한 마음이 설 곳은 줄어들었다. 이름 적지 못한 시간을 생각하며 떠난 굉음과 남겨진 그을음을 척박한 내면의 공동에 넣었다. 전자에 대한 기억은 가위 기록적이다.

득과 실로 구성된 창문을 열자, 바깥은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무더위를 향한 잔향이 현실을 두세 칸 아래로 끌어내린 날 이후로 2주가 채 되지 않은 때였지만, 그날은 반세기 전처럼 여겨졌다. 이곳에 무릇 자리 잡은 영광이라던가 영험은 어떤 분위기도 받들지 못한 채 탁한 위기만 초래했다. 상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정황이 슬그머니 이를 드러내 세계의 밑바닥인 듯한 속의 입구를 들추자, 정신은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모두 내던지고 양 극점으로 소산한다.

조은시, 관성적 태도, 210 x 145 x 61cm, 판넬에 유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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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gue Yang
seunggue Yang

새로운 아침을 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