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_양승규
- Date: 2025. 01. 16 – 03. 02
- Place: 에브리데이몬데이
- Location: 서울 송파구 송파대로48길 14
- Hours: 화 – 토 / 12:00 – 19:00
- Contact: @everydaymooo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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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이 무척 좋은 사내였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했으며 더 나아가 정신을 인류로 나아가게 했다. 그는 실로 간소했기에 이 거창함은 나의 것이었다. 그것은 때에 맞지 않은 외투로 여전히 두껍거나 얇다. 낯익은 풍경에서 낯선 부분을 확정하는 게 뒤탈이 없는 일이란 걸 알지만, 때로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어 할 말이 몽땅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직면한 외면을 불사한다. 그가 여태껏 무릅쓴 게 없다고 해도 그의 인상은 변함없을 터다.
그동안 벌어들인 감정은 소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저 초라한 상태로 조촐하게 상상을 준비했다.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처지가 금박을 차려입고 달의 초입을 기다린다. 이제 보름을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의 인상에 안녕을 바라며 내심 반긴 숫자. 그것은 곧 자릿수에 변화를 맞을 예정이다. 크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무작정 몸집이 비대해지는 경우를 흐뭇하게 상정한다. 이에 적어도 거짓은 없다.
상당히 기호적인 숲. 즉물적인 하늘과 소원 없는 아이. 표면이 매끈한 표주박의 이동은 갈수록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잦은 빈도로 표정의 시기를 앞당기거나 뒤로 물린 수는 없었다. 곤란들은 입가로 군집하여 무엇이라도 행하여 애썼고, 애먼 기세에 상실만 누그러들었다.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실제가 간단히 사로잡은 외다리를 지나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지경을 몸소 겪을 테요. 자신보다 앞선 필요가 이를 긍정하니, 퍽 든든하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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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의 파안을 알아볼 수 있으려나. 주변은 평소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그 전과 큰 차이가 없는 명칭이었으나 그럼에도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기에(동일성을 범한 꼴이었다) 시점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철저한 외곬으로, 나머지는 들쑥날쑥한 오솔길로. 어느 길의 입구에 설지 결정하는 동안 상시는 불탔다. 연기 없는 불이었고, 큼지막한 모닥불이었다. 산의 일부가 타오르듯 했다.
인색한 이의 지갑 속에 군더더기 없는 지폐가 서너 장, 존재 자체가 무질서한 명함 두 개, 사용 기한이 지난 교환권 한 뭉치 정도가 있었고 각기 종류가 다른 감정을 연역하는 중이었다. 무심코 그중 하나를 골라잡으면 나에게 보복하듯 선각은 더 멀어지겠다. 아둔한 상태로 맞은 밤의 평원을 기억함과 동시에 떨쳐버린다. 세상에 깊은 구덩이가 존재하는 이유를 비로소 깨닫는지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묘한 상태로다. 가만히 외로우려나 싶었다.
으슥한 곳에 속았다는 것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괜한 속셈뿐이었다. 자아는 도중에 버려두었다(이에 붙을 저장의 개념은 아직도 터럭조차 찾을 수 없다).
가급적 환한 낮에 얼어붙은 날의 고동 소리를 들었다. 그 자체로 붉은 것에 기다림을 매어 둔 일로 받을 질책이라면 그저 달갑겠다. 귓가가 저릿해지면 질리도록 손마디를 보았다. 사실 지금까지 싫증이 난 적이 없긴 하다. 너 없이 사는 내가 대체 어느 세태의 부스럼이라니. 어느 낱말을 소용없이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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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수레 끄는 이의 평온이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조금 전에 지독한 선례를 보았기에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그렇게 목례는 가려졌다.
모르쇠로 일관한 내면의 외양간은 녹슨 자물쇠 천지다. 부연 눈앞이 원색적인 실무를 다룰 때 변변한 계획 따윈 없음을 재인식한다. 이 과정에서 빛 발하는 새로움은 적도 편도 없다.
일거리가 없기에 젖은 손으로 어떤 일이라도 벌이며, 가쁜 숨을 재운 들뜬 눈으로 허상을 물기투성이 흔적에 누였다. 바닥은 익숙한 듯 자신을 저몄고, 여러 수량을 확보한 것에 만족하기도 하면서 고독한 늦장을 부렸다.
여기까지다. 이 말에서 시작된 마침표의 향연. 말허리로부터 자욱한 안개까지, 인사는 곳곳에. 통창으로 이루어진 건물과 대로변에 속한 마을. 주인 없는 의구심으로만 빚을 수 있는 결함이 있다. 바람이 불어 잇속이 시리다. 저 끝으로 날 데려가.
축하는 긴 여정의 초입에 해야 한다. 거절은 언제나 입체적인 표정과 함께, 낯 뜨거워도 추상적이지 말 것. 당부에 섞기엔 일부 엇나간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다음을 기약하는 건 성가신 일이야. 뜻과는 반대되는 떨림으로 의도를 드러낼 수 있을까, 우리.
낮은 천장, 그 밑으로 비집고 들어가 이곳이 동굴이든 험한 산길이든 상관하지 않고 공평하게 눈 감으니, 공공연하게 드러난 송곳의 치부. 그것에 손잡이는 없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던 때로 무력하게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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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기의 소원은 역시 볼품없었다. 한 뼘 공간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다. 발에 차인 설움이 기교로서 살아간다. 이름을 시간에 묻고 그 위를 평탄하게 하는 작업은 비루하고도 묵묵한 감정을 요구했다. 이에 응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나로, 본의 아니게 외롭게 된 꼴이다. 시작은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모서리로 흘렀으며 더 이상 혼란은 대수롭지 않았고 심정은 보다 하늘에 가까워졌다.
난롯불로 두터워진 관계가 있다면 정황상 횃불은 누구의 주머니를 밝히느라 수고를 받들 터다. 이 짐작과 같은 식으로 비틀거리는 일상은 터무니없는 만남이 이어진 와중에서도 일정을 뒤로 미뤘고 이해에 미열을 보냈다. 잦은 열꽃에 파란을 씌우니, 그것에 겹기보다 그것이 단지 고와서 까닭 없는 앞섬에 까무러칠 정도다. 답지에 장황한 연기가 피어날 때 때묻지 않은 구름이 하늘 위에 띄엄띄엄 놓인 발판을 오르고, 그렇게 나는 피상적인 피륙으로 이동한다.
먼 미래는 시쳇말로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는 공원이었다. 그곳은 서서히 번지는 색깔 하며, 별반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보통 하며 그 자체로 가득 우수(憂愁)를 죄고 있었다. 손아귀의 힘은 단단한 바위와 기품을 두른 섬으로 구성되었는데, 짚은 악에 받친 듯 바위를 제 안에 두고 속을 끓여 댔다.
맥없이 고꾸라질 수는 없으니, 정령 내가 만끽한 덮개가 주위에 수두룩한 일섬인가. 될 수 있으면 제각기 다른 때에 나타나 한동안 세계를 비추길. 사뭇 고요한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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