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조홍신 석사청구전 《볕뉘》

조홍신, 볕뉘, 2024, Oil pastel on paper, 170 x 150cm
이미지_양승규
  • Date: 2024. 10.09 – 10.14
  • Place: 세종아트갤러리
  • Location: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09 세종대학교
  • Hours: 10:00 – 18:00
  • Contact: @chohong_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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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에 불을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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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지막하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에 빚을 내서라도 크기를 불린 장독이었다. 이런 묘사로 획득할 수 있는 건 시기와 엇갈린 자격쯤. 어째 씀씀이가 줄었다. 옛 친구의 곁은 갈수록 높이를 잃어가는데, 이에 일언반구도 못 한 나는 이렇다 할 수식 없는 사내가 분명하다. 

“빈 잔에 편히 드리울 볕이든, 그림자든 혹은 어떤 생명이든 그것들 전부 나이 꽤 먹은 사람의 앞가림을 뒤흔들고 때론 좌우한다.” 

숨이라도 가빠야 주변과 동떨어짐을 잊는다고, 곤란한 처지는 어째 구부정하게 서 있지도 않아 더 이상 바로 세울 수도 없고. 필연적으로 하늘은 곧다. 그 아래로 떨어지는 도덕적 관념, 일탈의 무게가 있다고 믿고 싶은 것. 배회에 대한 증명보단 규명이 필요한 지금이 작금을 고사한 채 미처 경험하지 못한 내일만 끄집어낼 때, 이는 지독한 외면일 테지. 

새벽에 바깥은 형체를 태우는 소리로 가득하더군. 그 포화에 침묵도 졸고. 줄곧 바란 휴일은 먹빛 운수를 읊조리는 데, 혹은 그것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데 다 써버렸지. 어째 무급을 쓰다 버린 꼴. 수고가 속수무책으로 무의미를 지향하는 건 흔하고도 의향 없는 일인지도. 어긋난 틈을 비집고 환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니 그것은 화를 면한 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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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듣는 아침, 동일한 이름의 반복으로 형편의 무감각화를 가속하기도, 그것에게서 벗어나 험준한 산새를 발등에 기록하기도 한다. 하늘 아래 놓인 신체가 무상함을 느끼기엔 아직 겪지 못한 일들이 많아 반쯤 포기하듯 경험에 날붙이를 들이대는 바다. 관계라 칭한 만남이 누렇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누르께하게 제 색을 발한다. 

소낙비의 꼬리엔 많은 이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꼬리 주인 닮은 그들의 존재는 잠깐. 외치는 시간에 비례해 늘어나는 그늘 위로 대여섯 뼘 남짓한 장대가 목적 없이 누웠다. 평화의 굴곡은 여느 가도보다 평편하기에, 이 대수롭지 않은 사실이 상대적인 시간 뒤로 후미진 골목을 선사한다. 그 속에 남루한 변명과 어색한 번영, 그리고 세상사의 반영을 뒤적이는 손이 가끔 소리로 다가온다. 소리로서, 바로 그 직함으로서. 

작디작은 여유가 하나둘 모여 이룬 일과 일 사이의 공백, 그 속에 웬만한 주머니 정도면 끝없이 넣을 수 있을 터다. 무한과 무모함, 영원과 영악함, 단순한 기호로 적당히 묶은 항목이 등받이 있는 의자에 두 다리를 기대고서 취기라도 오른 듯 엉거주춤 일색이다. 뜨거운 숨이 밝힌 겨울은 대낮을 틈타 눈부시게 타오른다. 아닌 밤중이 누군가의 손톱 안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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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럼없이 웃는 게 어떤 생각(혹은 이유)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나, 이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가능성에 둥근 시야가 모습을 일부 보였다. 그것의 총체는 어떤 정체를 무릅쓰고 다가오는가. 존재 방식으로 전진을 선택한 것, 도리어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은 평온 내지 고독이다.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일상이 지속되는 인물에게 각기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세계를 구축할 정도는 아닌 군상들을 던진다고 할 때 고려할 사항은 잊힌 기억으로, 이는 기록적인 폭우를 향한 무에 가까운 그리움이었다. 엷은 환상이 두꺼운 일상과 그다지 밝지 않은 빛을 깨는 동안 한쪽으로 기울어진 태도를 본 그는 가벼운 우수에 젖었다. 그것은 적당한 요량인지도 모른다. 

“질서들을 줄 세우는 데 호령은 좀처럼 쓰이지 않소. 아니 먹히지 않다고 하는 게 적확한 표현이겠지만.”

그들은 태생적으로 명령에 대한 염증이 있어, 그들조차 거센 반항심을 잠재울 수 없는 처지인 게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여전히 바쁜 두 손으로 허공에 알 수 없는 칠을 하였다. 누구의 부재는 불붙듯 들끓고, 상상의 초입에 사사로운 의견이 다툼 그 자체를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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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를 대신한 가로등이 양옆으로 죽 늘어선 길이었다. 그곳은 지나기도 전 목적지에 도착한 인상을 주었다. 수척하게 빛나는 수은등이 볼모로 잡은 게 무엇인지 지금도 알지 못하지만, 그 길에 처음 당도했을 땐 어떤 힘의 관계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라고 생각했다. 불을 모으는 짓, 지극히 현실적인 꿈이 되어 의식의 안팎에 두 다리를 걸치고 타오름을 토로한다. 

“지금까지 거쳐온 타자의 수는 내리막길에 놓인 볏섬과 근원은 동일하기에 그 둘을 관계 짓는 단독에 옷깃이든, 소매든 몸에 걸친 일부를 가져다 대는 거요.”

익숙함에 방편이 있을 리 없어 그저 멀뚱히 사물의 모서리를 노려보았다. 밝은 대낮과 대조를 이룬 건물의 지하는 유독 탁한 얼굴빛을 내비쳤으며 그 앞에서 서성이는 게 훗날 판단에 억측을 일게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마땅한 수순으로 여겨졌다.

‘다부진 체격의 산허리는 제 굽이를 전부터 구비한 듯했고, 이 철저한 준비성이 앞날에 대한 짐작을 예언으로 바꾸는지도 몰라.’

어느새 등에 짊어진 풍경, 한때의 불씨, 이곳저곳을 옮겨 다닐 거라는 말, 모두 의중 위를 떠다닌다. 
불을 넣어둔 장독 위에서 현재의 높이를, 한편으론 깊이를 치하한 후 고개와 손목을 천천히 꺾으면 우두둑, 소리 사방에 피어나며 한달음에 광휘가 달아나며.

이미지_양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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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틀릴 때마다
묵고(默考)로 화를 면했다.

볕이 뉜 자리에
긴 낮이 

하루아침에 당신은 뉘신지.

seunggue Yang
seunggue Yang

새로운 아침을 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