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_양승규
- Date: 2024. 11. 04 – 2024. 11. 16
- Place: 세종대학교 세종뮤지엄갤러리 3관
- Location: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09 세종대학교 광개토관 B1
- Hours: 10:00 – 18:00
- Contact: @nrokcha

무게 / 정지원

이방인의 토요일은 말로 빚은 등대. 그것이 뿜어낸 빛은 양어깨가 깊게 파일 만큼 짊어진 짐을 걷어냈다. 그것은 이국이었을까. 뜻밖의 이동이었다고 술회한 누군가는 촘촘한 수기에 스며든 채 얼굴을 잃었다. 가히 파멸적인 안부다. 불빛은 줄기와 기둥의 형태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지표에 나타났다. 앞선 선택은 편견과 조금 냉철한 견지로 이루어진다. 낯선 자, 몰골이 말이 아닌 자, 설익은 표징을 허투루 삼킨 자 등 이방인에 대한 주관적 묘사는 많지만, 단순 편의성을 위하여 한 글자로 축약하는 바다. 어느 강에선 면치 못한 확장일지도 모른다. (한 글자로 축약한 묘사로서의)’그’는 경험의 부재를 속 편한 대로 뜻깊은 존재들의 그늘이라 여겼다. “인상 좋네” 가냘픈 말 위로 덩그러니 뜬 외성.
때아닌 삶을 여러 상자에 나누어 담고 하나부터 여섯까지 거꾸로 센 뒤 사각의 물체들을 하나하나 쌓았다. 이는 무력한 심정으로부터 시작된 들창코의 패악을 분명히 주지하려는 시도다. 부질없이 객관적인 상자들이었고, 그 정도의 탑이었다. 상자의 집적은 여부없는 창고의 높이가 되었다.
공유된 세계가 없는 관계를 바닥에 끌며 날이야 밝아라, 하고 소리칠 게 뻔했다. 그의 행동은 예측자에게 개량된 울음을 주었고, 그것엔 소리가 없었다. 세상 몇몇은 소리 없이 울었다. 언덕을 만들어내는 공장의 부지가 침묵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날마다 낡아간다. 한숨이나 꿈, 격양된 변명 내지 소원이었던 것. 갈고 닦은 시선 무더기가 불안에 타고, 너저분한 공간이 공의 구질을 떨어트려도 누군가 극구 만류한 안녕은 기어코 안녕에 쓰일 터다.

사람이 많군. 사람이 많아. 흐드러진 어휘를 들고 멈추었다. 분명 그것에 이름은 없으나, 그 순간만큼은 확고한 이름을 손에 쥐고 있는 듯했다. 한 떨기 휴일과 성실한 인물은 비교적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부실한 억측에서조차. 어디까지나 외마디의 입장에서 사물을 파악하고, 그렇게 거두어들인 인식에서 소외를 찾아내 보람이나 가치 어쩌면 과도한 긍지 같은 것을 평한다. 그것들은 물론 나의 것이 아니며 언젠가 내 소유의 문을 두드릴 리도 만무하기에 편한 잠을 바라기도 한다. 자질구레하게 무너진 어귀는 이름난 동굴의 꼬리. 가벼이 들어 올린 말수로 불특정 대상의 수고를 덜었다. 물체보다 먼저 그림자가 쪼개졌다.
천천히 포개지는 하늘을 보았다. 그때가 저녁이라는 게 썩 복잡한 심경에 나를 빠트렸고, 그 깊고 일률적인 공간에서 해가 들지 않는 곳을 생각해 냈다. 이는 뜻하지 않은 발로와 셋방에 갇혀 서로만을 좇았기 때문인지도. 어둑한 실내와 으슥한 실외의 구분은 돌연 두 눈이 되었다. 눈 감을 때마다 들녘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검은빛이 울었다.
많은 수효의 종류는 단독이었다. 나와 상관없는 일에 관한 묘사를 조리 있게 늘어놓는 재주는 저주로 드러나 말수를 앗아갔다. 어쨌든 불행한 일이다. 말문이 막혀도 숨을 쉬었고, 때론 웃음이 삐져나왔다. 어느 확립된 구도를 방해하는 요소처럼. 그것은 불길한 예언의 도구일까. 더없이 지위가 낮은 존재의 오로지 수단으로서의 등장을 반항심에 묶어 놓았다. 뻔한 결과를 빤히 쳐다보는 사이 시선은 번져 어디다 던져 놓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장족의 발전으로도 안을 수 없었다. 지난한 세월은 공중에 원을 그리며 화를 토한다.

비교적 멀끔한 허울을 유지하고 있는지, 난 가끔 의문이오. 단지 그뿐이로다. 이젠 괴로울망정, 외롭지는 않을 터요. 고작 빛바랜 함정이 도처에 있다고 해도 그곳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가, 확실히 말은 아끼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소. 좋거나 싫은 건 이제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인지도.
남과 나의 구별에 쏟을 시간으로 마련한 거처에 아무도 없다. 그동안의 인식은 제자리에서 뜀을 했는지, 조금 파인 바닥을 보며 짐작한다. 침울한 건 참이다. 더러 서럽지 않은 때도 있었다. 더러움, 난 그것을 이토록 사사롭게 사유한다. 방만하게 파악한다. 이 지경은 뜨내기의 데일 듯한 숨에서 제 비롯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더없이 속절없고 메마른 고독. 사실은 비참하면서 순수하게 두 눈으로 닥쳐왔다.
아무런 시각과 지각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짚 인형의 외형을 거듭 삼키며, 한때 기념이기도 했던 기록을 게워 내는 일. 짚이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젠 다 같잖다. 성실 또한 그렇다.
통로가 된 통곡을 지나 떠나는 말로, 밖에 비가 온대. 늘 푸르던 짐승, 그 녀석의 얼룩짐을 짐작할 수 없었던 거지. 벌목의 현장은 사려 깊었다. 철천의 관계쯤은 우스운 일이었고, 살 만하니까 적당히 설 자리 찾았다. 일방적이었던 일의 수가 줄어든 것. 이윽고 감내할 균형에서, 길 비슷한 무엇을 잃을 터다. 상실감보다는 계절감이 느껴질 테지.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운 목수. 작업의 진척 상황은 더디다. 지금까지 수없이 깨트렸던 성미에, 무너진 솟대에 고단한 기울임을 보내니, 당분간은 번안한 가을이다. 서두를까 보냐. 노도 없이 속을 젓던 이방인의 낯을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