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_양승규
- Date: 2024. 11. 18 – 2024. 11. 24
- Place: 추계예술대학교 창조관 C21 -3F, 4F
- Location: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로 11가길 7
- Hour: 10:00 – 19:00
- Contact: @kimcheeers

이미지_양승규
입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는 어떤 수기에 관한 첫 문장도 아니고 생이 끝나기 전 내지른 단말마의 비명 또한 아니다. 그저 입이 존재했다는 사실의 재현이다. 성한 두 발 앞에서 지팡이는 짚이는바 둘을 쥐고 솜씨 좋게 젓가락질한다. 의미와 함께 의도가 없는 일. 나는 퍼뜩 제자리에 선다. 뜨거움을 유지하는 것보다 식지 않는 게 더 손을 많이 탄다며 타지의 인상을 모두 차지한 이가 말했다. 그는 유독 사리에 밝았다. 종류가 천차만별인 시름을 시간과 관계없이 – 혹은 그것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투로 – 하나하나 구분해 보였다. 어쩐지 지루한 건 비루하다. 섬광의 요소로 거론된 일탈. 백열도 뜻하지 않게 얼었다. 이젠 그때 절반의 반에도 못 미치지만, 난 여전히 속에 불을 땐다.
바닥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홀연히 섰다. 그림자 꼭대기 위로 갈까마귀가 떼를 지어 날아간다. 이를 데 없는데, 날갯죽지 발악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흰 목둘레와 허연 배가 앞날의 여정에 여부를 가질까. 허구로 손등에 비친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자못 어떤 무리의 비행을 소모토록 원한다. 애초부터 그을린 종이가 자신의 여백이 좀 더 뻗치길 바라듯. 터럭만 한 빛으로도 밤은 대낮이 되곤 했다.
영구한 거처로 마땅한 게 없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잠재울 수 없던 시장기가 잦아들다 못해 가셨다. 섭취할 수 있는 온갖 것에 무심히 학을 뗐기 때문인지도(무심코 뗀 발걸음만치). 잇따른 부재에 무료한 한때를 덮었다. 생각은 길고도 두꺼운 장대. 이제 시종일관 나는 그동안 삼킨 실언을 게워 내 도로 씹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말을 잃고, 예의 긴 막대기에 올라탔다.

이미지_양승규
같은 곳을 반복적으로 배회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을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다루며 때때로 그 관계의 유대에 비례해 사물을 파악했다. 그것이 돈독할수록 어떤 사태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 감정의 역(逆)은 없었는데, 허공에 나뒹굴던 갈잎이 의도라도 한 듯 손바닥에 내려앉아 이목을 독차지한다. 먼저 말귀를 알아먹고 말꼬리 자른 게지.
아침 대신으로 소반 위 접시를 반나절 동안 바라본 후 천장의 끄트머리에 묻듯 붙어있는 종이 쪼가리로 시선을 옮긴 참이요. 끼니란 하루에 둘이 될 수도, 서넛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아무렴 사람마다 벅찬 때가 있기 마련이나, 요즘 들어 그동안 내게 들고 난 것을 생각하는 공간을 갖지요. 잘못되었다고 해도 내가 칭한 한 뙈기밭에 열 길 물속이 가득하니, 오로지 물정으로서의 자아를 가끔 돌보는 바요. 의지할 데 없는 낌새는 금세 잦아들 터요. 무시로 확인할 것까지야.
자욱한 풀냄새가 난 것은 나무 대야였다. 그 속엔 어떤 발걸음도 걸치지 못한 야성이 담겨있었다. 심사가 뒤틀린 듯한 모습은 나와 같은 나이의 편견 때문일 터(그것과 보낸, 때론 부둥켜안은 날들을 낱낱이 복기할 때가 머지않은 듯하다). 노쇠한 짐승이 숨을 내던지듯 다가와 유쾌한 기분 – 희박한 대기 같은 그것 – 을 주억거릴 때는 이미 거친 생태에 이골이 난 뒤였다. 무르익음을 지나 곯아가는 주변이 비스듬하게 썰린 뿌리채소처럼 보인다. 예의 대야에 가만빛을 띤 수풀이 타오르듯 일렁거린다. 그 뒤에 속된 생활상이 불콰한 양상으로 흐를 터다.


식탁 위에 향은 좋지만, 과육이 신 과일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장면을 몇 번이나 떠올리는 사이 실내는 움직였다. 인적 드문 마을 어귀에 우울하게 서 있는 표지판처럼 정지해 있던 실내였다. 철 지난 외투를 벗듯 떼어낸 예상으로 수수한 인상을 쑤었다. 예의 장면의 교체가 곧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열차에 탑승했다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나는 종종 바로 전 일을 잊곤 한다. 뒤늦게 이를 깨닫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남 일 돌아보듯 하는데, 어디 내버릴 수 없는 천성일 터다.)
실내의 이동으로 생긴 의식의 홈을 메울 작정으로 시원한 음료 찾지만, 마실 것은 놀이에 주린 사람 마실 나가듯 없다. 차가운 뒷모습에 이윽고 물방울이 맺힐까. 사람들로 복작이는 열차 안에서 혼자 남겨진 기분 위를 오르며 고도를 높이는 게 내겐 설익게 밥을 짓는 일이었다. 때가 언제든 일종의 끼니를 위한 준비. 한술 뜰 때까지 투박한 천장을 곱씹음으로써 시간을 보낼 터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의식의 틈은 수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며 그곳을 통과하는 물의 시원은 억수다. 그것은 지난여름 발간 자두 한 알을 삼키려 쏟아지던 물의 숱한 손아귀였다. ‘소나기가 떼로 몰려와 일렬로 서면 웬만한 장마보다 길지.’
실내가 본래의 성질을 획득하자, 나를 둘러싼 세상은 전부 바깥이 되었다. 이젠 소박한 인상을 예닐곱 걸음마다 기억해 내며 이동을 일삼는다.
‘나는 본래 어떤 온실이라도 상관없으니, 그곳에 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계단 오르기가 여러 숨을 불러 모으더니 앞선 생각에 대한 평을 물었다. 누구도 답하지 않을 게 뻔해, 얼른 꾸밈없는 인상을 떠올렸다. 아직 두 걸음밖에 내딛지 않은 때였다.

이미지_양승규
될 수 있으면 오전에 활동을 시작하려고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오히려 그런 이유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는 처음엔 당부의 목소리도 다가왔지만, 이젠 안부조차 묻지 않는다. 이 시간대에 덩그러니 놓이길 자처한 내가 어디 가지 않음에도.
“오전은 날씨와 무관한 구석이 있어. 비가 내리든, 날이 맑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양상을 유지하지. 이를 보고 있으면 모든 것들이 자질구레하게 느껴져 어떤 무례함도 나를 통과할 수 없을 거란 일종의 확신이 들곤 해. 그게 중요한 거야(또한 그래야만 할 거야). 그렇고 그런 삶에 뾰족한 꼬챙이를 들이대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 모습에 무슨 흥미라도 있다는 듯 구는 건 근사하지 않으니, 바로 뒤돌아서 갈 길 가. 그러면 우린 그 행보로 거리를 사선으로 긋고, 횡적인 사고를 통해 고약한 수직을 걷어 낼 수 있을 거야.”
하늘에 달이 반쯤 떠 있다. 몇 가지 가재도구로 식탁은 허전함을 면했다. 바구니 안에 식기는 서로를 부시며 깨끗함을 논했고, 곧 그것을 누렸다. 통창은 누가 빛을 끼얹은 듯 번쩍거렸다. 그것은 무엇도 암시하지 않은 채 단지 번쩍댈 뿐이었다. 밤중은 자신이 언젠가 희끄무레해질 것이란 걸 염두에 두고 있는지 갈수록 깊어만 갔다. 그것의 의중은 뼈마디의 우물인가. 나와 관련 없는 일이다. 역할에 대한 억측을 이젠 분명히 할 때가 된 건지도. 저 사다리의 끝엔 어떤 창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든 게 수행의 과정이었다. 순례의 길에서 수레를 끌던 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외곬이며 참 억센 들창이었다. 난 이제 타고난 무영(無影)에 든다. 비존재로서 뻗친 손은 염을 하던 원으로 가득해질 터다.

이미지_양승규

이미지_김지안

이미지_양승규
세상의 위상이 달라졌을 때 좀처럼 늘지 않던 말이 늘었다. 심정의 볏섬은 위험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다부진 덩치의 곤란들이 무엇에 맞서느라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언 발은 언감생심이라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비탄에 빠졌다. 비루한 감정이었다. 빈자리를 꾸어다 남루한 자루에 담아두고 헌 손을 털었다. 그럼에도 자루의 고된 인상은 변하지 않았으며 행색은 점점 부어올랐다. 쉴 새 없이 말하고, 듣는 이가 부재해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로 뻔한 소요도 불사르면서 허공을 보았다. 무릎 언저리가 뻑적지근하다. 연신 오르내린 계단이 표한 해묵은 감상, 분명 그것이 미끈거린 탓일 터다.
내가 싫대. 허물없이 지내고자 한 관계는 보란 듯이 실패. 실없이 웃고만. 그럴 수밖에 없을 만도 해. 사납던 꿈자리가 돌연 그립다. 이러다 말겠지, 자신했던 때가 불어난 빚에 허덕이며 결국 예정된 처지는 곤궁해지고. 고백에 도리어 감추어진 뜻은 사회 속에서 자신을 연마하며 의식적으로 추위를 느낀다. 개념으로서의 겨울. 그 중점에서 미처 자라지 못한 부분의 성장을, 그저 애 같던 속의 성숙을 바랄 뿐이다.
찌푸린 날씨 위로 걸었다. 적당히 우스운 지붕 떼를 보고 어제와 확연히 차이 나는 꼭대기 몇을 기억한다. 소리라도 되는 양 내지른 평판은 누구의 말로도 되지 못할 것이다. 말로써 세운 성곽의 부동이 문득 어질게 느껴지기도 한다. 미련하고도 미련한 청사진이 기울 때 불운에 허덕이던 백야, 그것의 운은 아니더라도 그 밖의 무엇이 트일 것. 삯으로 받은 과녁에 허우대 멀끔한 관념 둘이 꽂혀 있다. 이다음 화살은 부실한 사공이 될지도 모른다. 졸지에 나는 산으로 간다.

이미지_양승규
홀로 거리를 활보, 그 몸부림의 끝은 대차게 죈 선과 피붙이 앎을 끌어낸다. 헛되거나 서툰 사유라도 이를 죄 없이 지속하는 일. 내가 아낀 대상은 누군가의 무분별함이 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파악으로서의 나를 마른 표정 위로 끄집어낸 건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고집이었다. 나는 그것의 손아귀를 향해 헤엄을 던지곤 한다. 정확히 맞지 않아도 조금 스치기만 한다면, 그 일부를 접한 구원이 전부터 나를 염두에 둔 양 굴 것이고, 그렇게 나의 지위는 전부로 격상할 터다. 그동안 해온 겨냥은 마땅히 앞선 격상이 되어야 한다.하루도 거른 적 없던 삼킴을 이젠 도리어 뱉었다. 세상엔 그런 부재도 있는 것이라고 일종의 변명을 하였다. 구석에 비틀어진 계획이 있었다. 익숙한 책상을 사이에 둔 채 마주한 등받이 의자. 항상 창을 맞대고 앉던 자리였다. 이젠 창을 등지고 서먹하게 앞을 응시한다. 나는 오전에 손을 씻었다. 그때 일상의 행위에 포함될 수 없는 일로 즐비한 하루가 되리라, 하고 조금 낙담도 했다. 한평생 평면적인 인간으로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밥상머리 앞에서 나는 가위 입체적이다.
입방체를 되새기는 너와 나는 사무적인 혼돈이다. 소리 잡아먹던 때는 방금이었다. 우리보다 늙은 식물이 가만히 볕을 쬐고 있다. 식사 중인지도 모른다. 양분을 공급받는 모습은 어째 동적으로 느껴진다. 부리나케 자리를 떠도 다급한 일이 생겼나보다, 생각하리라. ‘화분은 깨졌고, 곡식은 고개를 숙였다.’ 이 말을 곱씹으며 나쁘지 않은 정도로 생각을 차렸다. 식기는 부서진 허공이다. 강 밑으로 가라앉는 몰입에 입을 가져다 댄 건 무슨 심보여야 할지.



이미지_양승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시간은 추상적인 마을에 사는 추상적인 인물을 가리켰다. 앞선 지목이 무구했냐고 묻는다면 정말 그랬다고 답할 작정이다. 둘로 떨어지지 않는 몫의 나머지는 그저 하릴없이 번쩍거린다. 바깥은 예고 없는 억수로 세차게 물들었고, 그렇게 젖은 빛깔로 새벽에 기대었다. 비스듬한 의도가 거짓을 찌를 때 주변은 묵은 공기를 밖으로 뱉는다. 가문 날 독자적으로 핀 꽃에 날개 접은 나비가 내려앉았다. 바싹 마른 개울은 제 밑바닥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홀로 뜻을 꾸몄다. 그것 이외엔 어떤 장식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세상에 온갖 그물이 존재하는 정도로 부재한다.
게슴츠레 뜬 눈에서 피로가 나왔다. 고개 숙여 낮은 천장에 주의하며 울퉁불퉁한 문턱을 넘은 여정이었다. 그 눈은 통로로서 기능한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것이 피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없어도 그 녀석의 안은 철저히 변화를 겪고 있을 터다. 어딘가 신비롭게 파인 구덩이 옆에 들꽃의 생태가 버젓이 존재하고 미숙한 사람 앞에 낯선 세상이 펼쳐져 있다. 불특정 방향에 대한 헤엄을 당분간 맡아 두기로 했다. 기분은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다. 나는 가끔 능선이라도 된 듯 나이를 오르고 넘는다.
예의 통로가 닫히면서 돌아갈 곳을 잃은 피로는 잊기로 한다. 눈을 감으니, 윤곽이 드러나는 불확실의 세계. 그곳에서 세끼의 보장을 원한다면 어떤 것을 몰아세워야 하고, 또 어떤 것은 내버려두어야 할 것이다. “하소연에 국한된 뜻풀이를 일삼으면 우물은 결국 구정(丘)이 된다. 너 빈집이라도 되고 싶은 게냐.” 외딴길 위 장사꾼의 숨을 사고팔았다.

이미지_양승규
도통 도착하지 않는 수레를 기다리기도 했다. 기다림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것이 누군가의 다행이었고, 조금 각진 바람이었다. 대화는 트여도 금세 막히고, 길가엔 미약한 바람이 불안정하게 일었다. 주머니에서 떨어진 동의는 얼마간 바짓단을 붙잡고 늘어지더니 쏜살같이 하늘을 날았다. 서로에게 좋은 일일 터다. 무감각은 오감에 번지기도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기도 했다. 세계의 윤곽을 힘들이지 않고 쥘 손이 나에게 있다면 퍽 안도할 터인데, 영락없이 두 손의 나는 그저 방심으로 살았다. 그 삶의 살갗은 야위었으며 억하심정 가운데에서도 악 소리 내지 못했다. 찌뿌듯하게 두꺼운 마음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짝이 맞지 않은 바퀴, 자꾸 바깥 걸음 한다. 그물에 걸린 백열등이 점잖게 떨었다.
표정에서 조금 물러난 웃음이 거리라는 것을 논할 때도 쇠딱지는 아직 채 떨어지지 않았다. 방은 갈수록 어렵다. 몸과 혼의 공백에 균형을 꿰매고 윤기 나는 색으로 어리석음을 칠했다. 더위는 깊고 추위는 높았다. 이 둘을 맞대면 미지근한 사방이 생길까. 조악한 물컵을 엎지르고 비로서 행차한 아이는 연신 내 옆에서 내렸다. 그 장마는 소나기를 이어 붙인 것이다.
노끈이 휘몰아치는 날이면 개똥벌레의 꽁무니를 쓴 채 사교적으로 굴었다. 나는 막역한 인물이다. 스스럼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자아에 밝지는 않은 됨됨이를 가졌다.
조리대 위로 온화한 인상이 펼쳐져 있다. 이는 시작의 과거일 터. 볕이 들지 않아 꽝꽝 언 어깃장을 해동하기에 적합한 조리대 밑엔 손잡이가 납작한 도구가 떨어져 있다.



이미지_김지안

이미지_양승규
앞으로 나아가길. 식전에 가쁜 숨이 잦아들길. 다음부터 당부는 말로서의 지위를 잃을 것이다. 허구한 날 남발하던 기약의 탓은 무지로 솟구쳐 누군가의 가망을 흐린다. 외길로 몰린 응어리가 허리춤을 가득 죈 띠를 풀어헤칠 때 너절한 관계는 홑이불을 둘렀다. 지금은 잠이 여윈 시기로, 선잠이 들끓는다. 방만하게 파악한 밤이 검소한 지출을 요구하며 이를 두어 번 반복하는데, 강조란 말꼬리에 곧 사라질 졸음처럼 임시로 머물러 있다.
괄목한 풍경을 선 채로 보았다. 순수한 목격보다 혼탁하더라도 깊은 주의를 바란 것은 한때 바리바리 싸기도 했던 갈망이 날것의 봇짐으로 의표에 드리웠기 때문이다. 그곳은 척박한 땅으로 뜻밖의 식생이 분포한다. 철을 지나쳤거나, 그것에 한참이나 못 미친 수풀이 배회하듯 존재한다.
관찰을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는 상태가 있다는 투로 푼 짐의 토대는 독신자의 포개기. 본디의 상태는 여러 상을 헤었다. 조용한 주변과 맞물린 관찰을 선망에 끼얹으면 응시는 나름 돌파구를 찾고, 그렇게 나는 바깥의 관조를 안으로 들이게 될 터다. 설익어도 무른 소용을 앞세웠다.
의자를 돋우었다. 그제야 왜단한 그것과 눈높이가 맞았다. 공유한 시야로 한다는 게 턱 밑을 매만지는 거라면 눈을 감아도 여전히 복에 겨울 수도 있을 것. 알맞은 시간과 적당한 취기는 찬합에 제 지붕을 틀었다. 그 위로 천 겹의 천작(淺酌)이 천천히 쌓이며, 이윽고 사물이 둘로 보이다가 셋으로도 보이고, 속이 울컥거리다가 금세 잦아들고. 어떤 구렁텅이보다 깊은숨을 게워 내듯 뱉었다. ‘미의식의 순환은 거절 없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이미지_김지안

이미지_김지안
파생

이미지_김지안
참 많은 웃음을 보았다. 그 무수한 수효에 지금까지 손에 쥐고 있던 일을 엎지를 뻔도 하였다. 셀 수 없음에 나의 기여는 얼마쯤 되는지, 생각하는 시간은 누군가의 곤란한 때와 동일하리라.
터무니없는 행위를 지켜보는 건 대수롭지 않은 기분이었으나, 이를 당면한 입장은 그러지 못했다. 사냥감을 목전에 둔 포수의 망설임은 그의 일상에 악으로 비치며 대안 없이 이룩한 성취는 곧 발 디딜 틈 없는 광장으로 변모할 터다. 이제 공통의 눈 밖에 난 치의 성실은 울음이 될 수밖에 없고, 중요한 사항은 단독으로 식음을 표할 준비에 흥미를 더했다. 본디 앞에서 파생이란 미로 섞인 지도, 전체에 속한 일부일 뿐. 그것 더러 멍석 위에 오르자, 하면 앞선 사물의 뒤꽁무니를 은근히 기대한 채 재주껏 까무러칠 준비할 터인데, 이는 진미 앞의 군침 정도로 당연한 소산일지도 모른다. 이 무지의 뒷설거지는 파생의 텃이다. 정체 없는 이가 지불한 세를 정신없이 쓰는 삯 없는 삶이다. 덥석 베어 문 양식의 소화가 우수해도 심사가 조악하니 멍석에 올라도 멍하니 서 있다가 해를 금한 낮처럼 숨죽이게 될 것. 기어코 펼친 기량이 인접한 그믐에 쏠리듯 버려졌다. 달이 차도 방치된 곳에서 곶을 죄며 성질의 상실을 성근하게 모른 체한다. 뾰족한 수는 오직 지형으로서밖에 드러날 수 없다. 광활한 바다를 마주한 끄트머리에서 상상이 사라졌다고 지극히 개인에게 한정된 사실을 불며 부당함뿐인 골목을 저절로 곡해한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던 골에 골머리를 썩이는 건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일 터. 앞서 언급한 성질은 이를 뜻한다. 동네 곳곳이 부패한다. 결국엔 모조리 곪은 채로 곡기의 초상에 눈을 박고 지금까지 기웃거렸던 관심에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성질의 부재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의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선고하는 중에도 파생은 쉬이 살려고 기껏 넘은 선을 고른다. 그 꼴 참 우습게 되었다. 궁지에서 꼴랑 집어 던진 게 제 몸부림, 어떤 미덕조차 배어있지 않는 떨림, 궁색하고도 곤궁한 미궁. 피는 붉고 시초는 짙다. 평생에 주름이라곤 없이, 좋다고 표한 자랑은 도래할 일 없는 가뭄에 대비해 비축한 식량과 같고, 그저 창고로 쓰인 공간이 죄다. 몽땅 구슬려 취한 가치에 가까스로 덤벼든 꼬락서니의 의의는 허락일까. 그 전에 눈멀어 가져다 쓴 어줍잖은 환락이다. 엉성한 미행, 무시할 수 없는 비애. 필사적으로 조형한 주조에 자화상이 우거지고, 형상의 숲을 훔치려다 몽땅 그것을 태워버린 벌로 휑한 동공에 처하며, 호흡에도 체하며.
해는 조금 기울었다. 누더기 걸친 날은 숭숭 뚫린 천의 구멍들로 내게 다반사란 것을 전하지만, 단지 통로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건지도 모른다. 다반사는 제 스스로 걸어와 – 마지막으로 예의 구멍을 통과하여 – 내 발치에 도달한 건지도. 난 그저 무량하게 통로를 묘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아니 애초에 이르고, 늦은 건 없는 건지도. 파생의 어쩔 수 없음을 우쭐댄다고 하였다. 이는 파안의 목격이 내게 대접한 일이었다. 그것은 단시간에 수가 불어나더니 가당치도 않은 사건을 여러 조각으로 분리한 뒤 무탈한 삶에 기꺼이 응했다. 각기 파편은 절로 촘촘한 망에 든다.





이미지_김지안
살煞

이미지_김지안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다. 손발이 먼저 얼었다. 나는 이름 모를 장소에서 익숙한 것이 나타날 때까지 걸을 작정이었다. 지금까지 눈은 낯선 것만 보았고, 왠지 앞으로도 그러하리란 짐작이 여정에 살을 붙이는 동안 떨떠름한 기분을 내칠 수 없었다. 불쾌한 대상의 느긋함을 모두 바라본 것처럼. 한 눈의 구매자는 먼발치에서 구른다. 두툼한 옷가지는 짝 맞춰 몸을 감싸고 있다. 그 수를 하나하나 헤아림에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느꼈다. 거친 말투, 반쯤 죽은 눈은 누구더러 견뎌내라고 버젓이 존재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물건의 값은 서둘렀다. 갈피가 기회가 되는 땅에 꽁꽁 무명실을 동여매고 호젓하게 떠난 이는 한가롭기보단 부끄러운 때를 건너고 있을 터다. 마치 가로등을 삼킨 듯 발밑을 쬐는 빛의 열원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그 지속에 중독을 바란다. 특정한 상태에 적을 둔 기운은 다가올 일에 대한 예언과 다소 의역된 하늘을 겹쳤다.꼭 들어맞는 부분과 그러지 않는 부분의 공존이 무익하게 회전한다. 굳은 어깨가 굴뚝을 통해 맥을 보내려 할 때 나는 아직 낯익은 것을 보지 못했지만, 잠깐 멈추어야 할지도.
차양을 치고 들어선 곳. 안쪽의 풍경은 어느 시가지를 그대로 가져와 던져 놓은 듯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오려낸 풍경을 구성했을 터. 내부의 일상이 나의 비일상과 만나자, 충돌로서 빚어낸 흔적이 일었다. 서로의 안녕을 바라는 인사는 제대로 된 식사도 없이 종일을 보낸다. 이 생각에 내 이름을 적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렵사리 기록을 마친 내가 다리 끌며 다가간 데는 난롯불의 잔재조차 남아 있지 않는 기구 근처였다. 비로소 검거나 흰 것을 아무도 모르게 좇았다고 생각했다.

이미지_양승규
독자적인 멈춤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이 정지라도 좋다. 나는 연속적인 하늘 아래 예상치 못한 몸 상태를 게워 내고 있었다. 이를 모조리 뱉어 낸다면 일상의 소중함으로부터 제법 거리가 있는 곳에서 새로운 방안을 꾸밀 터다. 간밤은 위아래 이가 부딪힐 정도로 추웠다. 지난밤의 일이 무척 오래된 것처럼 여겨진다. 고스란히 몸을 웅크릴 적에 나에게만 허용된 시선이 사뭇 건방지게 깜박거렸다고, 추상적인 꿈을 현실에 복원하려 애쓰듯 기억한다. 이젠 이해하지 않기로 한 일에 날개가 돋아도 그것은 천천히 걷는다. 거추장스러움의 본때를 속으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내면으로 끌어당기려는 처사인지도. 사람들이 으레 좋아할 법한 일이었다. 난 별다른 감상을 표하진 않았지만, 밝은 표정들이 대책 없이 반짝이는 게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잠잠히 웃었는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엇이 그립기도 하였다. 과거란 속절없지만 속뜻 없기도 하다. 어떤 시절에 뒤엉키며 살다가 작정한 듯 그것을 풀어헤친 오후. 속마음을 털어놓은 모양새가 유난이다. 바깥은 정적을 태우며 언 손을 녹였다. 어제보다 날이 포근한 건 소진된 침묵
때문인지도. 평소는 제가 들어갈 집의 평수를 넓히고, 되도록 천장도 높이며 거처를 마련했다. 당분간 삶의 이동은 확장과 함께 이루어질 터다.
긴 숨. 호흡의 길이가 허리를 칭칭 감을 정도로 길다면 그것의 끊어질 듯한 통증도 분별을 잃고, 머지않아 사라질 것. 날이 저물고 밝기를 반복한다. 나를 스쳐 간 사람의 됨됨이는 평균치에 근사한다. 기억날 듯한 단어를 떠올리는 시간이 두 발로 걸었다.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요즘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끼니에 번졌다. 저편에 기록될 식사. 한동안 나는 그것의 준비로 여념이 없을 것이고, 한술 뜨기까지 많은 일이 있을 것이고.
_____
미미! 美味!
김쨘!(KIMCHEEERS!) 작가는 식문화를 주제로 구상/추상, 형상/기호, 예술/상업, 예술품/기성품 등의 대립적인 요소의 층위를 공감각적 언어로 융합시키며 미식과 예술의 교차점을 탐구한다. 익숙함과 낯설음 사이의 일종의 긴장 관계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물성을 연구하며 방법론들을 정립한다. 기능에 충실하게 디자인되어 감정이 배제된 기성품을 융합해 감정을 탄생시키며 이를 통해서 상징적인 기호화를 형성한다.
먹는 것이 곧 나를 이룬다.
‘식당을 선정하고 메뉴를 고르는 일’은 주체적으로 식사를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를 연출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교차학문적인 김쨘!(KIMCHEEERS!) 프로젝트의 첫 번째 섹션은 작가가 선정한 미식 가이드이다. 복합적 인식을 통해 습득된 인지 행위와 조형성의 결합을 통해, 먹는 행위가 단순한 섭취가 아닌 지식과 문화 속에서 맛을 경험하는 과정임을 상기시키며 기억의 맛공간을 다시금 열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