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2025 겸재 내일의 작가》

《2025 겸재 내일의 작가》 이혜진, 이플, 한의도, 김여진, 윤예제, 이혜린, 조민주, 최혜연, 겸재정선미술관, 2025.07.29 – 08.23, 이미지_양승규
  • Date: 2025.07.29 – 08.23
  • Place:  겸재정선미술관
  • Location: 서울 강서구 양천로47길 36
  • Hours: 화 – 금, 10:00 – 18:00 / 토 – 일, 10:00 – 17:00
  • Contact:https://instagram.com/gjjs_artmuseum

조민주,SOS, 장지에 채색, 112.1 x 145.5cm, 2024 / 거룩한 밤, 방수포에 혼합재료, 181.8 x 227.3cm, 2021, 이미지_양승규

이 골목에 들어설 때마다 겸손을 행하던 길은 처음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엔 낯선 곳을 찾아가는 게 어느 정도 버거운 일이었고, 주위의 풍경이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우편 배달부 같았다(그의 성실에 노을은 한쪽 발을 끌며 느리게 걸었다). 잃어버린 지갑 찾는 노릇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일도 어느 때를 기점으로 소식을 접었다. 두 다리는 남몰래 정처 없었지만, 사실 두 손이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익숙한 곳의 하늘은 친숙한 대기를 나에게 건네주는 듯 굴었다. 그것은 대체로 은근한 향으로 눈앞을 자욱하게 하곤 했다. 이 포근함과는 별개로 눈 감고 뜨는 빈도가 줄곧 있던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려앉았으며 졸음은 어떤 음성을 취함으로써 소리 쏟아낼 준비를 마쳤다. 속에 가득 쥔 경로는 어느새 열십자투성이가 되어 일탈을 이탈한다.

대낮은 물론 환했다. 어찌 보면 가로등 불빛 안에 갇힌 듯도 하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건물의 낡은 간판이 대책 없이 빛났다.
누군가의 밤은 항상 이렇다고 한다. 그의 뒤탈이 사뭇 거룩하길 바란다. 한참이나, 나 뜻 없이 웃고.

조민주, 주차금지, 2024, 종이에 수성마카, 21.0 x 14.8cm, 이미지_양승규

웃음의 단위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의 양상은 무한하다. 회복 직전 몸 상태는 의식적으로 붉어지며, 검은 상자는 감당하지 못할 빛을 토하며. 논하는 대상마다 선명한 수혜를 입었다. 그것들은 앞으로 손을 뻗은 채 가만히 쇠기러기 떼의 울음이 들리길 기다리는 듯했지만, 종달새의 무리라 하더라도 상관없을 터였다. 다수의 날갯짓은 허공에 하얀 실금을 긋는다.

동공에 앉힌 가로수의 밑동을 여전히 파악하는 중이었다. 표정이 밋밋한 사람이 마지못해 색 구별을 하듯 이름뿐인 작업은 예상보다 확장된 외연을 가졌고, 그 중심엔 유명무실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질리도록 거듭된 행위의 안정은 지금까지 찾지 못한 묘목인지도 모른다. 숲은 이마 언저리에서 시작되어 목 뒤쪽 부근에서 끝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각의 생태가 시도 때도 없이 불안을 겪고, 그럴 때마다 재된 경험으로 뒤덮였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그곳의 하늘은 여러 우물이 한 점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사변적으로 물결쳤다.

김여진, 나의 성, 장지에 점토와 안료, 22.0 x 27.3cm, 2025 / 속임수를 위한 미소, 장지에 점토와 안료, 91.0 x 116.8cm, 2025, 이미지_양승규

시선은 종종 주체할 수 없이 비었다. 괄호가 너무도 거대한 탓에 그 안에 담긴 문장이 사라져 버리는 투로 발생한 공허였다고 생각한다(왠지 모르게 소맷귀는 파리한 안색에 젖어 있다). 저만치로 투사된 물체는 한없이 가여울까, 아니면 그저 가없을 뿐인가, 하고 어설피 혼잣말하였다. 두 상태의 공존은 쓸쓸하지도 번잡스럽지도 않았다.

스스럼없는 태도가 바닥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후, 가혹하다고 여겨지는 현상의 무게를 적당히 가늠할 때 우려는 다반사에서 튕겨져 나와 흉한 꼴을 내보였다. ‘더 이상 대면할 일이 없겠다. 그동안 엷게 칠해진 관계는 열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사물의 얼개라던가 하는 시시껄렁한 흔적만 남겨 놓고(이것은 곧 기억에 옮겨붙고) 좀처럼 울지 않는 사람으로서 망연하게 존재한다.’

약삭빠른 이의 상정은 역시 그를 닮아 잇속을 유독 밝게 보고 환한 그 빛을 보드랍게 느낀다. 따스한 포요에 휘감긴 채 어느 곤란은 여느 품에 겨워하는 이들처럼 무난히 상실을 받아들였다. 이와 동시에 고요함은 제 문턱을 높였다. 그렇게 수용과 상승은 나란히 거처를 검쥔다.

김여진 드로잉, 2024, 종이에 점토와 안료, 25.4 x 30.4cm, 이미지_양승규

반나절을 걸어야 대략이나마 크기의 윤곽이 잡히는 벌판이었다. 그곳의 중심엔 보얀 뼈마디가 층층이 쌓여 일종의 탑으로서 존재했다. 많은 사람이 예의 벌판을 장악했지만, 순전히 이를 파악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서너 명이 평한 중심이 소문을 올라타기엔 나른한 감정이 문제였고, 사람들 입과 입 사이는 쉬이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로 갈수록 위로 벌어졌다(이상하게도 아래로 가라앉는 법은 없었다). 고되면서 헛되었다. 말은 덧붙일수록 뒷걸음질 쳤다. 인사를 가장한 험담의 꼬리가 거창한 소리를 내려 연신 바닥을 내리쳤다.

사물의 높낮이는 유희에 불과했다. 무료한 군중은 저마다 눈에 보이는 차이를 즉각적으로 뱉었으며 숙고를 수반한 경우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눈에 핏발을 세운 이가 거동의 불편함을 한껏 내보이는 것으로 개별적인 차이를 주웠다. 공통을 휘두른 꼴이었다.
오목한 바닥으로 흘러 들어간 행위의 그릇됨이야, 솜씨 좋게 관심을 다른 데에 낭비하면 알아서 마를 우물이겠지.

seunggue Yang
seunggue Yang

새로운 아침을 여는 것이다.